보령현(保寧縣) 지내리(池內里), 현재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다. 본관은 신천(信川), 자(字)는 태초(太初)이며 판삼사사(判三司事) 문하찬성사 (門下贊成事)를 지낸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증손이다.
1443(朝鮮 世宗 25년, 癸亥) 53세
6월에 제주(濟州) 지대정현사(知大靜縣事)에 부임하여 해양(海洋)에서 왜선(倭 船) 한 척을 발견, 2명을 쏘아 죽이고 9명을 사로잡다.
1444년(世宗 26년, 甲子) 54세
2월에 제주(濟州) 대정지면(大靜地面) 요고천호(暸高千戶)로 재임 중,바다에서 왜선 한 척이 침입하므로 적의 군사 2명을 쏘아 죽이고 49명을 사로잡다.
1450년(文宗 즉위년, 庚午) 60세
7월에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에 이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다.
9월에 평안도 조전절제사(平安道助戰節制使)로 평안도 박천(博川)에 나아가 북방 을 방어하다.
1451년(文宗 1년, 辛未) 61세
1월에 황해도 조전절제사(黃海道助戰節制使)가 되다.
1452년(文宗 2년, 壬申) 62세
1월에 회령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 에 오르다.
1453년(端宗 1년, 癸酉) 63세
부친 진(鎭) 별세하다.
1455년(世祖 1년, 乙亥) 65세
12월에 원종공신(元從功臣) 2등(等)에 녹훈(錄勳)되다.
1456년(世祖 2년, 丙子) 65세
3월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에 오르다.
도승지(都承旨) 박원형(朴元亨)이 임금에게 아뢰기를,“이제 강순을 의주목사로 삼았으나, 강순은 겨우 상복을 벗고 담복(橝服)을 면하지 않았으니 형세가 속 히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주는 본시 중요한 땅인데다 명나라 사신의 행 차도 있으니, 청컨대 강순을 재촉하여 부임토록해서 제사(諸事)를 조치하게 하소 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의주목사에서 판회령부사(判會寧府使)로 삼다.
1458년(世祖 4년, 戊寅) 68세
7월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복귀하다.
10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로 봉조청(奉朝請)하다.
11월에 중추원부사로 삼다.
1459년(世祖 5년, 己卯) 69세
1월에 행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가 되다.
7월에 행상호군(行上護軍)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다.
1460년(世祖 6년, 庚辰) 70세
3월에 판길주목사(判吉州牧使)로 임명되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침묵(沈黙)하고 말이 적어서 장수(將帥)의 도량이 있으 니, 내가 매우 훌륭한 그릇으로 여긴다. 젊었을 때부터 변진(邊鎭)을 여러 번 맡 았으니, 내가 어찌 경의 수고한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마는, 그러나 지금 변방의 걱정이 있으므로 부득이 경을 판길주목사(判吉州牧使)로 삼았다. 특별히 처자(妻 子)를 거느리고 부임하도록 하니, 경은 가서 잘하라.”고 하였다.
6월에 판영북진도호부사(判寧北鎭都護府使)로 삼다. 임금이 유시(諭示)하기를, “지금 영북진을 허수라(虛水喇)에 설치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영 (營)을 새로 설치하고 적을 어루만져 복속시키는 일을 꾀하는데 경(卿)이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하므로, 경을 판부사로 삼았으니, 경은 그 마음을 다하여서 나의 뜻 에 부응(副應)하라”고 하였다.
9월에는 모린위(毛燐衛)의 여진을 정벌하다.
10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종성절제사(鍾城節制使)가 되다.
1461년(世祖 7년, 辛巳) 71세
1월에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 都節制使)가 되다.
1462년(世祖 8년, 壬午) 72세
1월에 야인(野人)의 동태를 임금에게 보고하다.
3월에 강순에게 유시하시기를,“전번에 보낸 부레풀[(어교)魚膠]을 칠한 화살 [(전죽)箭竹]은 사후(射侯)하는데 허비하지 말고, 오로지 군기(軍器)에만 사용하 라.”하였다.
7월에 야인과 벌인 전투에 대한 보고를 하다.
12월 강순에게 유시(諭示)하기를,“경은 이제 임기가 찾으니 마땅히 체임(遞任) 해야 할 것이나, 요즘 변경의 일이 기무(機務)가 많아서 경이 아니면 오로지 위 임할 수가 없으므로 잠정적으로 경을 번거롭게 하여 그대로 맡기고 안정되기를 기다려서 곧 체임하겠으니, 경은 내 뜻을 잘 살피라.”하였다.
1463년(世祖 9년, 癸未) 73세
해빙기 야인(野人)이 쳐들어올까 우려된다는 보고를 하다.
2월에 야인 올적합(兀狄哈)등이 상경하기를 청하는 자가 혹 20명, 혹 30명이 계 속적으로 끊이지 않으니, 두목 되는 자만 올려 보내고 그 나머지는 어염(魚鹽), 포자(布子)를 주어 보내다.
7월 귀순하지 않은 동량(東良)에 사는 장가(將家)와 다랑합(多郞合)을 토벌하다.
11월 북방 오랑캐의 움직임에 대하여 보고하다.
12월 야인(野人)이 중국조정에 귀부한 동향에 대하여 보고를 하다.
1464년(世祖 10년, 甲申) 74세
3월에 임금에게 《병요(兵要)》․《진서(陳書)》․《병장설(兵將設)》․《백장전 (百將傳)》․《통감(通鑑)》등의 책을 보내줄 것을 청하다.
7월에는 야인들과의 교전(交戰)이 있었으며 적변(賊變)에 대비하고 있음을 보고 하다.
8월에 야인의 동태와 수어(守禦)를 엄하게 하여 적변에 대응하고 있음을 보고하 다.
1465년(世祖 11년, 乙酉) 75세
3월 공격해온 변방 야인을 격퇴시키다. 7월에 중추원사로 전임하다.
1461년부터 중추원사로 전임될 때까지 5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북방을 방어하였 으므로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다.
1466년(世祖 12년, 丙戌) 76세
4월 도총관(都摠管)이 되다.
9월에 경기(京畿)에서 강무(講武)할 때 좌상대장(左廂大將)이 되다.
1467년(世祖 13년, 丁亥) 77세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선봉이 되어 어유
소(魚有沼)․ 남이(南怡)등과 홍원(洪原)․ 북청(北靑)․ 만령(蔓嶺)등지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情忠出氣布 義敵愾功臣) 1등에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으로 봉해지고 우의정에 승진되다.
8월에 임금이 건주위 야인 대책에 관해 유시하기를,“건주위 야인이 의주(義州) 를 도적질하여 싸움의 시초가 이미 생겼다. 이번 가을 겨울철 방어가 실로 긴박 하여 강순을 쓰고자 한다”하였다.
9월에는 야인 소굴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서정장군(西征將軍)이 되었다.
정병 일만 명을 거느리고 어유소, 남이 등과 함께 길주(吉州)에서 압록강을 바로 건너 건주위 동북쪽 올미부(兀彌府)를 공격하여 추장 이만주(李滿住)와 그의 아들 등 수백 명을 베고 다수의 포로와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곳에 “0년 0월 0일에 조선대장 강순이 정병 일만 명을 거느리고 건주 위를 공벌했다.”는 표 말뚝을 세우다. 그 후 건주제위(建州諸衛)는 쇠퇴하여 1522년(중종17)까지 그 세력은 미미하였다.
10월 건주위를 정벌하고 임금에게 복명하다. 보경당(寶慶堂)에서 인견(引見) 하고 또 상정소 당상(詳定所 堂上)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어 장군을 위로 하였다.
1468년(世祖 14년, 戊子) 78세
1월에 보령현에 계신 어머님께서 병중이므로 가서 뵙고 인하여 선영(先塋)에 분 황(焚黃)하려하니, 임금이 명하여 말미를 주고 역말[驛馬]을 주게 하였다. 또 의원(醫員)과 아들 석손(碩孫)에게 역말을 타고 따라가게 하고 승정원(承政 院)으로 하여금 충청도 관찰사에게 치서(馳書)하게 하기를,“우의정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잔치를 베풀고, 또 선영에 분황할 때에 치전(致奠)하며, 돌아올 적 에는 한번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도록 하라.”하였다.
2월에 보령현에서 돌아와 임금을 뵈옵고, 어머니의 병이 아직 낫지 못하였다하 여 하직(下直)하고 돌아갔다. 임금께서 어머니의 약으로 인삼(人蔘)을 의원(醫 員) 송흠(宋欽)에게 주어 보내도록 하였다.
4월에 건주위를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 헌종으로부터 은 20냥과 비단을 하사 받 다.
7월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산양군(山陽君)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임명되 었다. 임금이 병중이므로 명하기를,“지금 이후로는 경 등이 대궐에 나아가 세자 와 더불어 서사(庶事)를 의논하여 결정하라.”하였다.
우의정 김질(金礩)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세자를 모시고 서사 (庶事)를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8월에 세자가 영의정 강순, 우의정 김질과 함께 서사를 의논하다.
1468년(睿宗 즉위년, 戊子) 78세
9월 7일 세자 예종(睿宗) 임금의 자리에 오르다.
9월 16일 세조(世祖) 세상을 뜨다.
10월 24일 유자광(柳子光), 남이가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모함하다.
남이는 병조판서(兵曹判書)에서 해임되어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이 때 그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나자,“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는데 이것을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이 엿듣고 이 사실을 평소 남이의 사람됨을 못 마땅하게 여기던 예종에게 고해바쳐 역모를 꾀하려 한 다고 하였다.
이 고변(告變)의 결과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국문(鞠問)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장군을 항쇄(項鎖)하게 하여 물으니 대답하기를“신이 처음 갑 사(甲士)로서 외람되게 성은(聖恩)을 입어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며 또 공신이 되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모반(謀叛)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그렇 게 여겼으나 남이는 “강정승도 신의 당류(黨類)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장군 은 남이를 돌아보며 꾸짖기를“내가 어찌 너와 더불어 모의 하였느냐”고 하였 다. 장군에게 당여(黨與)를 물으니 없다고 말하였다. 장신(杖訊)하기를 명하니 장군은 말하기를 “신이 어찌 매질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들어서 당여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군은 이미 고령이므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복(自服)하여 1468년 10월 27일 사형을 당하니 향년 79세였다.
사후에 시체를 수습하여 보령 청연역촌(靑淵驛村:역말) 뒤 배자산(培子山) 아 래 간좌(艮坐)에 안장하였다.
1818년(純祖 18년, 戊寅)
화를 입은 지 350년 만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이 건의하기를,“고 영의정 강 순은 세조가 돌아가고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이 남이를 모함할 때 죄도 없이 함께 화를 당하였습니다. 지금까지 3백년이 넘도록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남아 있고 아직 신설(伸雪)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이를 원통하게 여기 고 있습니다. 청컨대 고 영의정인 강순에 대해 그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소서.”하였다. 이로써 억울한 누명이 풀리고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1871년(고종 8년, 신미)
3월에 관작이 복구 된지 53년 만에 ‘장민(莊愍)’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다
1994년(甲戌) 11월 12일
대천대학설립에 따른 부지조성으로 공의 산소를 이장하였다. 묘는 보령시 미산 면 도흥리 산26번지 갑좌(甲坐)로 모셨다.
아현님께서 올려주신(조선왕조실록의 인물 중)글의 내용이 있는 것에 첨부된 내용들을 올림니다. 색인이 본문에는 나와 있지않아 파일을 첨부했습니다. 파일을 열어보시면 파란색 글씨로(1~35번까지)첨부색인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으니 참고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